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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의 숫자: 재정이 흔들릴 때, 제국은 전략을 다시 쓴다[투자,멘탈] 2025. 4. 5. 06:00728x90
#김영범_헤시드대표
사진: Unsplash 의 Kit Suman 《퍼거슨의 숫자: 재정이 흔들릴 때, 제국은 전략을 다시 쓴다》
2025년 2월,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Debt Has Always Been the Ruin of Great Powers. Is the U.S. Next?」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미국의 국채 이자비용이 사상 처음으로 국방비를 넘어섰다고 지적하며, 이를 ‘퍼거슨의 법칙’이라 명명했다. 당시 이자비용은 GDP 대비 약 3.1%, 국방비는 2.9% 수준이었다. 퍼거슨은 “이자비용이 군사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강대국은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고 경고하며, 로마 제국에서 대영제국, 소련에 이르기까지 과거 제국들의 전례를 끌어와 지금의 미국과 겹쳐 보았다.
퍼거슨의 경고는 인상적이었다. 단순한 수치를 넘어서 미국 패권의 방향을 묻는 글이었다. 그 장면 하나를 ‘법칙’이라 이름 붙이고, 역사 속 제국들의 쇠퇴를 끌어와 배치했다. 말발은 여전했고, 프레임은 단단했다. 간결하고 명쾌했다.
특히 이번 글은 퍼거슨 특유의 장기가 잘 드러난다. 숫자를 단순 비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역사적 패턴으로 연결한다. 그는 미국이 군사비보다 이자비용을 더 많이 쓰게 된 상황을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닌, 제국의 분기점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로마, 대영제국, 소련 등 과거 강대국들의 쇠퇴 사례를 끌어와 맥락화하고, 마침내 하나의 법칙—“퍼거슨의 법칙”—으로 명명한다. 재정과 패권을 한 줄기로 엮어내는 이 서사 구성은 대단한 통찰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는 위험을 정확히 지적했지만, 그 뒤에 나열한 해법은 너무 뻔했다. 재정개혁? 정신 차리자? 군비 줄이지 마라? 그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소리다. 지금 필요한 건 그다음이다. 왜 이런 구조가 생겼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퍼거슨은 화려한 말과 법칙을 던졌지만, 전략은 초라하다.
사실 진짜 위기는 따로 있다. 숫자 하나의 역전이 아니다. 구조의 전환이다. 미국은 지금 재정위기의 초입에 있다. 수년째 기본값이 돼버린 2조 달러대 재정적자, 고령화로 늘어나는 복지지출, 거버넌스의 마비. 거기에 이제 고금리 체제가 고착되고 있다. 이건 단순한 적자 확대가 아니다. 저금리라는 전제가 무너졌는데, 지출 습관은 과거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퍼거슨은 점을 봤고, 나는 그 점이 만들어낸 선을 따라가 본다. 이 선을 끊지 못하면, 제국의 추락은 통계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지금 이대로 현상유지는 답이 아니다. 미국은 그걸 안다. 트럼프를 다시 불러낸 것도 그 자각의 일부다. 대중들까지 누군가는 기존 공식을 깨야 한다고 느꼈고, 그 생각은 정치적 선택이 되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뭘 하겠다는 건가? 간단하다. 덜 쓰고, 더 걷고, 남한테 떠넘기고, 그래도 군비는 더 쓰겠다는 것. DOGE로 1조 달러를 깎겠다고 하고, 관세로 돈을 벌겠다고 한다. 방위비는 동맹국이 더 내라 하고, 정작 본인은 국방예산을 늘리겠다고 한다. 거칠지만, 그 안에 분명한 문제의식은 있다. 지금 판으로는 안 된다는 정치적 감각.
하지만 이게 해법이 될까? 전망은 밝지 않다. DOGE? 들으면 시원하지만, 실속은 뚜껑 열어봐야 안다. 관세? 소비자 물가만 자극할 수도 있다. 방위비 분담? 말은 맞지만 미국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군비 확대? 결국 또 부채다. 결국 구조는 그대로인데, 겉만 바꾸는 위험도 있다.
진정한 해법은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다. 복지 구조 개편, 세제 조정, 국방 전략 재설계, 공급망 재배치—모두가 손대기 어렵고, 정치적 저항이 크다. 이자비용을 억제하자니 금리를 낮춰야 하고, 그럼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한다. 지출을 줄이자니 선거에서 지고, 세금을 올리자니 여론이 폭발한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 전례 없는 실험 중이다.
기존의 질서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는 자각. 그래서 트럼프가 다시 선택된 것도 그 맥락 안에 있다. DOGE든 관세든, 그것이 해법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그 아래 깔린 메시지다.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집단적 직감이다.
미국 정부는 지금 S&P 500 지수보다 10년 만기 국채금리를 더 중요하게 본다. 주식시장이 들썩여도, 금리가 안 잡히면 안심하지 않는다. 재정을 바로잡는 것이 곧 경제를 살리는 길이며, 패권을 지키는 길이라는 자각이 깔려 있다. 지금 미국이 보는 것은 성장률이 아니라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다. 외형이 아니라 내구력이다.
미국은 지금 재정위기 극복을 국가 운영의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 국채금리 하락이 우선이고, 적자 축소가 전제다. 문제는 이 우선순위가 국제경제와 지정학 전체에 구조적 충격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고금리의 장기화는 달러 강세와 고금리 시대의 고착을 낳고, 그 결과 신흥국 자금 유출, 글로벌 투자 위축, 금융시장 불안정이 반복된다. 게다가 미국은 재정적 이유로 동맹국에 방위비를 전가하고, 군사적 개입도 선택적으로 줄이며, 동맹의 재편과 위계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한국은 이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글로벌 금리 체제, 미중 전략 경쟁, 동맹 비용의 현실화, 기술·무역질서의 리셋—이 모든 것이 미국의 재정 전략에서 출발한 파장이다. 결국 한국은 선택해야 한다. 전례 없는 세계에서, 어떤 전략을 가질 것인가. 퍼거슨의 법칙은 숫자 하나를 말했지만, 우리가 읽어야 할 건 그 숫자가 불러올 미래이다.
역사학자는 긴 흐름 속에서 경고를 한다. 경제학자는 구조를 보고, 거시적 여파를 읽는다. 하지만 전략은, 결국 모두의 몫이다. 지금 미국은 자기 방식으로 그 전략을 쓰고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 것인가. 퍼거슨이 던진 숫자 하나는, 이제 우리에게 선택과 전략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되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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