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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업, 숙련 노동자가 핵심인 산업
    [투자,멘탈] 2025. 4. 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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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미상)

    Photo by 서 은호 on Unsplash

     

    화물선 중에서 제일 쉬운게 소위 벌크 캐리어다. 철광석, 석탄, 곡물 운반선 같은 것들인데 이런 화물들은 화물창에 쏟아부은 후 뚜껑만 잘 닫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선체만 튼튼하게 만들고 엔진만 멀쩡하면 된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수요는 꽤 많은 배다. 크게는 화물 선적량 기준 30만톤 이상 (75kg 체중 성인 남자 400백만명!) 부터 5000톤 이하의 작은 배까지 다양하다.

     

    조선소를 해외에 건설하거나, 외국에서 조선소를 짓고자 하면 맨 처음 건조를 시도하는 것도 벌크 캐리어다. 쉽고 간단하지만 수요는 많고 난이도가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짓고 벌크 캐리어 건조를 시작하면 다들 엄청나게 고생을 한다. 한국에서는 눈 감고도 지을 수 있고, 돈이 안되어 이제는 안 짓는 식은죽먹기 보다 쉬운 배가 도무지 만들어지질 않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선박 건조는 블록 공법을 사용한다. 레고 블록을 조립해서 목적물을 완성하듯 배를 100여개의 블록으로 나눠서 만들고 도크나 선대에서 크레인을 이용해서 쌓아 올리고 붙이는 공법이다. 이 공법이 처음 도입된 건 100년 정도 전의 영국과 미국이었는데 반대가 심했다. 블록 공법의 장점은 여러개의 블록을 동시다발적으로 만들고 이를 한꺼번에 쌓아 올리면 비용과 건조 시간을 대폭 줄일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만약 블록끼리 잘 안맞게 되면 반대로 비용과 건조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위험이다.

     

    배는 물이 새면 절대 안된다. 만약 블록 A와 B를 연결하는데 철판을 제대로 용접하지 않으면 나중에 배가 부러지거나 물이 새게되므로, 이런 배는 고철 덩어리만도 못하게 된다. 블록과 블록을 설계도면대로 정확히 만들면 서로 이어 붙일 때 틀어지거나 안 맞는 일이 없지만, 문제는 도면대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의 유무다.

     

    철판을 자르는 것은 보통 CNC 플라즈마 절단기가 하므로 도면대로 나온다. 하지만, 철판 조각을 도면대로 붙이는 과정에서 용접 후 수축, 변형, 틀어짐 등이 발생하고 작은 오차들이 쌓이면 블록과 블록이 잘 안 맞는 문제가 속출한다. 블록이 어느 정도 만들어져서 치수를 측정하면 도면과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되므로 초짜 조선소에서는 블록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무수한 수정과 재작업을 필요로 하게 된다.

     

    처음 조선소를 만들고 투자를 해서 그럴듯한 기계들을 배치해도 숙련된 작업자들이 없으면 배는 만들어 지지 않는다. 제일 쉽고 간단한 벌크선도 안 만들어진다. 억지로 배를 만들어도 화물창 위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운항 중 파도가 치면 뚜껑 틈으로 물이 새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친 파도를 통과한 이후 화물창 뚜껑이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아서 화물을 실은채로 수리 조선소로 직행하는 배들도 많았다.

     

    배는 무거운 화물을 실을 수록 두꺼운 철판을 사용하는데, 철판이 너무 두껍지 않다면 설계도면 대로 용접해서 구조물을 만들기는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것이 좋다. 철판이 너무 얇아지면 용접열로 변형이 심해서 도무지 블록을 만들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그래서 만들기 제일 쉬운 배가 벌크 캐리어이고, 제일 어려운 배가 미려한 모양에 사람을 많이 싣는 크루즈선이다. 군함은 크루즈선만큼 선체 만들기가 어렵다.

     

    미국에서 군함이 제대로 건조가 안되는 것은 숙련 노동자 부족 문제가 가장 크다. 조선소 일은 고되고 힘든데다가 나하나 잘 한다고 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명이라도 엉터리로 작업하면 블록은 안 만들어지고, 배 전체 건조도 지연된다. 평균 숙련도도 중요하고, 숙련도가 제일 떨어지는 작업자의 수준이 최저 기준을 통과해야만 한다. 여기에 미국 조선소들의 문제는 또 있다. 군함 건조 과정에서 복잡한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숙련도도 어느 정도 있고 인건비도 맞출 수 있는 작업자들은 (합법/불법) 이민자들이 대부분이다. 불법 이민자는 당연히 고용을 못하고, 외국 기술자도 투입할 수 없다. 실력있는 작업자들은 돈을 훨씬 많이 주는 플랜트 건설 현장으로 빠져 나가 버리니 답이 없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조선 현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조선불황으로 직영 생산직의 신규 고용은 거의 없었고, 정년퇴직자로 수는 줄었다. 외주화가 계속되면서 조선소 생산 현장에서 직영 작업자와 외주 작업자의 비율은 이제 2:8 수준까지 올라갔고 실질적으로 배는 외주 작업자들이 다 만들고 있다. 그런데 외주 작업자들이 최저 임금 수준의 처우를 받고 그나마 체불이나 업체 파산이 빈번하니 다들 건설현장으로 떠나 버렸다.

     

    직영을 뽑지도 못하고, 고기량 외주 작업자들은 떠나 버린 후 이제는 해외에서 인력을 수급하고 있다. 지난 2년간 국내 3사에 투입된 외국인 노동자는 2만명이 넘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국적은 다양한데 최근에는 네팔, 방글라데시 등 서남아 출신들이 많다. 그들 나라에서의 임금보다 국내 최저 임금이 5배 이상 많으므로 한국어 시험도 보고 용접 기술 등을 익혀서 국내에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문제는 이들이 대부분 고국에서 기술 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취업비자 특성상 몇 년 지나면 돌아가야 한다. 사실 이들도 주말 없이 몇 년 일하고 돈을 모아 고국에서 가게라도 여는 것이 꿈이다. 가족을 데려올 수도 없고, 데려오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숙련 노동자가 되기도 힘들지만 숙련도가 올라가도 향후에는 다 빠져나갈 것이다.

     

    최첨단 이지스 군함이던 LNG운반선이던 해양플랜트던 기초 품질이 안되면 조선소의 생산성은 올라갈 수 없다. 기초 품질은 작업자들의 숙련도와 직결된다. 미국 조선소들이 군함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우리에게 기회가 열릴 수 있지만, 그 전에 우리 조선업은 기초 체력을 어떻게 잘 유지할 수 있을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외주 작업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시혜차원의 일이 아니다. 전체적인 숙련도가 점점 낮아지면 어느 순간 블록과 블록이 서로 맞지 않아 배가 안 만들어지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2만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애써 익힌 숙련과 경험을 어떻게 잘 이 땅에 정착시킬지도 고민해야 한다. 결국 배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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